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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시간 개편안 - 주 69시간제,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육아도 못할 것

정부가 현재의 주 52시간의 근로시간을 최대 69시간까지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습니다.

근로시간 관련정책은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서 그것을 보는 시각이 극명하게 갈리는데, 일단 노동자 단체에서는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건강’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합니다. 그렇다면 ‘건강’ 외에 이 정책을 반대할 사유는 없을까요?

현실론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기존 주 68시간에서 주 52시간으로 근로시간이 단축된  2018 7월 1일입니다. 그런데우리나라 사업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5~49 사업장에는 그보다 3년이 늦은 2021 7월 1일이 되어서야 적용되었습니다.

Labor Table
[출처] 한겨레 - 사회노동 2018.07.01

주 52시간이 도입될  경영자 단체는 대체 일은 언제 하냐 극렬히 반대했고노동자들이라고 모두 찬성한 것도 아니었습니다노동시간을 줄이기 어려운 현실에서 수당만 줄어드는 부작용을 걱정하는 전형적인 약자의 <현실론> 그들의 이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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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위 기사에 대한 댓글들 &gt;

처음 주 52시간 얘기가 나왔을 때는 마치 근로자가 놀고 먹어도 되는 세상이 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봐야 평일 40시간에 연장근무 12시간을 더한 개념인데, 평일에 1시간씩 연장근무를 하고도 토요일까지 7시간을 더 근무하면 52시간이 됩니다. 기본 40시간임에도 많은 사업장에서 최대 시간을 거의 다 활용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게 한다? 일이 많을 때에는 69시간을 일하지만 일이 없으면 놀게 해서 자유롭게 일하고 더 많이 쉬게 해 주겠다는 발상은 프로젝트 베이스로 근무하는 특정 업종이나, 몇몇 단기 호황업종에는 굉장히 잘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5~49인 사업장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노조가 없는 사업장이 86%에 이르는데, 몇 달 동안 쉬지 않고 일했다고 "휴가 한 달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로자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될까요?

과거 주 52시간제를 도입할 때 ‘사용자 우위의 현실'에서는 시기상조라던 그 <현실>은 지금의 <현실>과 어떻게 다른 걸까요?
 

일과 가정이 양립하는데 도움을 준다?

주 52시간제가 도입되고 한동안 근로시간 단축으로 "남성들의 가사노동 참여시간이 늘었다"며 사회적으로 뭐 대단한 변화가 초래되기라도 한 것처럼 호들 갑을 떨 때가 있었습니다.

사실, 남성이 가사나 돌봄에 참여하는 시간이 늘어난 것은 맞지만 그게 반드시 52시간제 도입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측면이 있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남성의 가사 참여가 늘어나는 사회적 트렌드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 52시간조건에서도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퇴근하고 곧바로 출발해도 8시 정도는 되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저녁 있는 삶은 커녕, 씻고 자기도 바쁠 시간입니다. 앞으로는 남성들이 가사분담을 하고 싶어도 그러기 어려워 질 것 같습니다.
 

열심히 일한자, 떠나라??

 
정부는 주 69시간씩 빡세게 일하고, 일이 없을 때는 화끈하게 쉬면서 가정에 충실할 수 있으니 ‘일과 가정이 양립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우려되는 부분입니다.

지금도 주 52시간제는 대부분 제조업체들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다음 달에 보름 동안 휴가를 가려고 이번달에 나 혼자 공장 라인을 돌릴 수 없고, 반대로 지난달에 충분히 일 했다는 이유로 일거리가 있건 없건 <나는 내 휴가 떠난다>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대기업 소속의 제조업 연구소에서 근무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일주일의 대부분을 8시에 출근하고 저녁 9시가 되어야 퇴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개발 프로젝트가 생기면 그게 끝날 때까지는 새벽 1~2시까지 근무를 하고도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출근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 밤샘으로 일하고 프로젝트를 끝낸다고 휴가를 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연구소장이 선심이라도 쓰듯 “내일은 오후에 출근해” 한 마디가 전부였습니다. 대기업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직종도 그게 현실입니다.

세상에 일거리가 없는 기업은 없습니다. 모든 기업, 모든 사업장은 항상 업무량에 비해 부족한 인력을 유지하려 합니다. 업무량이 줄었다고 인력을 줄일 수는 없지만, 반대의 경우에도 인력을 늘리지는 않습니다. 노동시간을 늘리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자가 우위에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예전의 주 68시간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주 69시간 정책이 시행되면 퇴근하자마자 씻고 자고 다시 출근하는 게 근로자의 일상이 될 게 뻔합니다.

혹시라도 운이 좋아서 주 69시간 정책의 수혜직종에 근무하는 경우라고 해도 그게 일과 가정의 양립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용시간이 들쑥날쑥 불안정해지면서 가족들과 공통의 시간을 내기는 더욱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몰아 일하고 몰아서 쉬면 편하지 않나?

직장인에게 규칙적이고 예측가능한 출퇴근 시간과 요일관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일하는 날과 쉬는 날, 또는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이 사업장의 사정에 따라서 들쑥날쑥 해진다면 불편함을 떠나서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기가 불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주 52시간인 지금도 맞벌이 가구가 초등학교 저학년의 어린 자녀를 키우기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부부가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을 맞추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가정에서 한 사람은 파트타임으로 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 69시간이 시행되면 대부분의 여성은 경제활동을 포기하게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고용의 유연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쉬는 정책’은 단기 알바 자리만 양산할 게 뻔합니다. 주 69시간씩 두 달 정도 일하고, 나머지는 병원치료를 받거나 실직상태로 지내다가 몇 달 후에 또다시 단기로 고용되는 것을 반복하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현재도 법으로 보장된 연차나 1년의 육아휴직이 그림의 떡인 사업장이 많습니다. 양극화된 고용시장에서 남성이 당당하게 육아휴직을 가는 사업장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업장에서는 출산한 당사자가 사표를 써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출산율이 문제가 아니라연애할 시간도 없는 세상

말로는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이 제일 큰 문제라고 하면서도 정부에서 추진하는 정책들은 출산율을 늘리기는커녕, 연애마저 어렵게 하는게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모든 근로자가 대기업에 고용된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자영업 사장님인 것도 아닙니다. 근로자의 절대다수가 노조 조차 설립할 수 없는 매우 불안하고 열악한 지위에서 고용주에 기대어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주 69시간이 정착되면 「제주도 한 달 살기도 가능하다」는 정부의 홍보성 멘트에 깊은 한숨이 나옵니다.

‘빡세게 일하고 맘껏 쉬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직장 그런 게 있기나 할까요?

모두 반대하는 게 아니라는 거 잘 압니다. 아이들이 다 성장해서 육아의 부담이 없고, 고용은 안정되어 해고의 위험이 없고, 외벌이 만으로도 넉넉한 고속득 직장인에게는 굉장히 좋은 제도임에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국민들을 더 황당하고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이 제도를 노사 협의로 정하기로 한다」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 어느 사업장에서 노사가 동등한 위치에서 이런 협의를 할 수 있을까요?

아직은 권고안에 머물러 있지만, 국회가 국민들의 기본적인 삶을 지키는 역할을 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